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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 세가지 시사점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8. 2. 23:41

제목: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감      독: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
장      르: 드라마
등      급:
상영시간: 01:29:00




시놉시스(요약 줄거리)
크리스마스를 앞둔 루마니아의 작은 마을. 여명이 밝아오고 거리의 가로등이 하나씩 꺼질 무렵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이 시작된다. 지역방송국 사장이자 프로그램 진행자인 비르질은 루마니아 혁명 16주년 기념일을 맞아 “1989년 12월 22일 12시 8분, 우리 마을에서도 혁명의 움직임이 있었는가?”라는 주제의 토크쇼를 진행하기 위해 아침부터 분주하다.

한편 술주정뱅이 역사 선생 마네스쿠는 토크쇼가 있는 아침, 월급을 받자마자 빚을 청산하느라 빈털터리가 되고, 고장난 TV와 씨름하던 에마노일 할아버지는 여느 해와 같이 산타클로스 아르바이트를 청탁받는다. 토크쇼가 시작되기 몇 시간 전, 출연진들이 펑크를 내자 비르질은 평소 친분이 있던 마네스쿠와 에마노일 할아버지를 급하게 게스트로 초청한다.

하지만 방송이 시작되자 에마노일은 종이배를 접으며 딴 짓하기에 바쁘고, 사회자 비르질은 마네스쿠와 그날 그 시간에 시청 광장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가지고 말도 안되는 실랑이를 벌이는 등 토크쇼는 점점 엉망진창으로 흘러간다.

출처: 씨네21 http://www.cine21.com/Movies/Mov_Movie/movie_detail.php?id=21213

이 영화는 코미디다. '진짜' 코미디 영화는 혼자 봐도 소리내며 웃는 영화다. 그리고 진짜 '좋은' 코미디 영화는 그렇게 웃는 와중에도 생각할 거리를 주는 영화이다.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는 그런 코미디 영화이다.

이 영화가 시사해주는 것은 크게 세가지다.

첫째, 혁명이 일어난 지방에서 떨어진 지역의 소시민들에게 혁명의 의미.
둘째, 혁명이 났어도 달라진게 없는 서민들의 힘든 생활.
셋째, 토크쇼 내에서의 핵심 논쟁 '혁명이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라는 물음.

토크쇼의 제목 "그 때 우리 시에서도 혁명의 움직임이 있었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첫째와 둘째 시사점을 내포하고 있다. 애초에 혁명에 따른 큰 변화가 있었다면 그 질문을 할 필요가 없다. 혁명이 났는데도 달라진게 없는 소도시의 생활이 '여기서도 혁명이 있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라는 지엽적인 '사실'을 따지게 만들었다. 그 때 혁명이 있었으면 어떻고, 없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여전히 무기력한 현실은 그 때 이 도시에서는 혁명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이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우리도시에서도 혁명이 있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기 위한 것일까.
사실 그 때 시청광장에 누군가가 있었는가라는 주제는 혁명날을 맞이한 지방방송에서 충분히 기획해 볼만한 것이긴 하다. 그러나 실제 토크쇼가 아닌 '영화'이고, 영화 속에는 감독의 생각이 반영된다고 할 때 토크쇼의 주제는 달라진게 없는 현실에 대한 비판을 얘기하려고 설정하였을 것이다.

사람은 어떠한 노력 이후 달라진 것이 없으면, 현재를 덮고 과거에 집착하게 된다. 눈 앞의 현실보다 과거의 사실을 따지고 든다. 정말 혁명이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면, 토크쇼의 주제는 혁명 이후 어떤 점이 달라졌는지에 초점을 맞추는게 더 의미 있을 것이다.
빚더미에 시달리는 무기력한 게스트와, 혁명 따위는 상관없이 종이접기에만 몰두하는 게스트와, 그 때 시청 광장에 있었는지만 집요하게 묻는 사회자. 처음부터 의미없는 주제를 던지고, 그와 함께 황당한 인물들을 내비침으로써 냉소적이지만 동시에 귀여운 웃음을 유발시킨다.

첫번째와 두번째 시사점은 다른 리뷰에서 다루고 있고, 내가 그보다 더 잘 다룰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든 생각은 실제 영화 속 토크쇼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이다. '독재자가 이미 물러가고 난 뒤에 시위대가 시청 앞에 모였다면 이는 혁명으로 볼 수 있는가?'. '(애매하지만) 시대적 요구에 의해' 기존의 지배집단을 무너뜨리려는 행위가 목적에 맞는 결과를 이끌어냈을 때 이를 혁명이라 부른다면, 이 행위와 결과의 전후관계가 뒤바낀 상황도 혁명으로 볼 수 있는가.
시간의 전후 관계가 바껴있다면 사실 그 시위를 혁명의 일부로 볼 수는 없다. 전후 관계가 바뀐 상태에서 인과관계를 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시위가 없었더라도 이미 독재자는 물러날 상태였고 시위는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사회자의 지적대로 그 경우에 시위는 의미가 없다.

시간 관계가 아닌 공간 관계로 따질 수도 있다. 만약 소도시에서 굳이 시위를 하지 않았어도 독재자가 물러날 상황이었다면 이 또한 시위의 의미는 희미해진다. 독재자가 지방의 일부 소도시에까지 시위가 번졌다는 사실을 한번이라도 인지할 수 있었다면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지 못했다면 소도시에서의 시위는 독립적인 사건이다.

2008년의 촛불시위로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을 이끌어냈다고 가정해보자. 청계천 광장에서 촉발된 이 시위는 서울의 광화문 광장 뿐 아니라, 대도시 지역에 까지 퍼졌고 결국 재협상을 만들어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이 때 광장에서의 시위는 참여하지 않고, 방에서 혼자 촛불을 켜고 구호를 외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자신도 미국산 쇠고기 재협상에 영향을 미쳤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사람은 누구나 제어 욕구가 있다. 제어 욕구란 무엇인가를 자신의 힘으로 변화시켰다는 욕구이다. 정치욕이나 권력욕도 모두 이 제어 욕구에서 나온다. 자기가 응원한 팀이 스포츠 게임에서 이기면 이 제어 욕구를 만족 시킨다. 설사 집에서 가족끼리 응원을 하여 선수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더라도 제어 욕구는 만족 된다. 행위에 따른 결과가 미미하다면 제어 욕구를 만족 시키지 못하게 되고 좌절하게 된다. 촛불 시위를 참가한 사람 중에서는 재협상을 이끌어내지 못해 좌절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추가협상이라도 이끌어 낸 것에 대해 자신의 제어 욕구를 만족 시킨 사람도 있을 것이다. 토크쇼에 나와 자신은 분명 그 때 시청 광장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마네스쿠 또한 자신이 혁명을 이끌어 냈다는 제어 욕구를 분출하는 것이다. 결국 그 시간에 술이나 퍼마시고 있었다는 것이 여러 제보를 통해 드러나게 되는데, 제어 욕구를 위해 자신을 속이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회 구성원의 행위는 사회적 결과물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사회적 결과물을 내지 못하는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사건들도 있다. 결과를 보고 그 원인을 따질 때 원인에서 배제된 사건들을 일컫는다.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전혀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특정 사건을 위한 특정 행위로서의 의미는 없다.

영화 속 사회자가 집요하게 묻는 "그때 거기 (독재자가 퇴진하기 전) 있었습니까?" 하는 질문은
첫째, 그 때 거기에 없었기 때문에, 독재자의 퇴진에 우리가 영향을 못 미쳤기 때문에, 달라지지 않은 팍팍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냐는 것과
둘째, 그럼에도 자신들이 혁명을 이끌어냈다는 제어 욕구에만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도 함께 담고 있다.

혁명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영감쟁이와 자신도 혁명에 동참했다고 우기는 빚쟁이와 의미없는 과거 검증에만 집요하게 매달리는 사회자를 통해 감독의 위트 섞인 냉소는 드러난다.


*다른 리뷰
씨네 21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2001001&article_id=49662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4001&article_id=49822